Sur l´eau 72

고향

우연히 광주의 모습이 담긴 사진, 영화, 드라마를 볼라치면 악착같이 다시 한번 찾아 보곤 했어.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나 봐. 향수병이란 게 지독한거거든. 뛰는 가슴을 꾹 참고 도착했던 고향은 그리도 그리워했던 곳이 아니었어.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지. 주체없이 뛰는 가슴은 어릴적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였을 터인데 고향 어디에서도 어릴 적 나를 만날 장소를 찾지 못했어. 탐욕으로 가득찬 정복자들에 의해 유린당한 고향을, 머리는 이해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몸은 지독히도 거부했어. 고향을 잃어버린 몸은 니체가 말했던 골동품적인 역사를 상실한 슬픔에 매일 울먹였어. 좋은 음식을 먹어도 계속 야위어만 갔지. 불과 넉달만에 돌아 온 이곳, 뮌스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

Sur l´eau 2012.07.01

철학이란 무엇인가

지난 삼천년에 관해서 스스로에게 해명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한 채 머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Wer nicht von dreitausend Jahren sich weiß Rechenschaft zu geben, bleib im Dunkeln unerfahren, mag von Tag zu Tage leben. - Johann Wolfgang von Goethe -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행위는 경이로움 thaumázein 과 함께 시작한다 (cf. Menon 80a). 이러한 경이로움은 단순히 심미적으로 매료된 상태가 아닌,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심지어 현재 상태를 뒤흔드는, 고통스러운 혼동을 말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나 칸트의 비판적 사유 그리고 아..

Sur l´eau 2012.06.26

Straubmühlweg

초록빛 바닷물처럼 한 없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나도 모르게 뛰어 들고 말았다. 한참을 걷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름모를 무성한 풀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겁이 났다 발바닥이 아팠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보니 너무 멀리 왔다 앞을 보니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들판의 한 중앙에 내가 서 있었다. 도취에서 깨어나 맨정신에 걷다 보니 고통스러웠다 온 몸은 땀으로 뒤범벅 되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은 나의 발바닥을 아프게 했고 제멋대로 거칠게 자란 풀들은 나의 온 몸을 쏘아댔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야만 했다 들판의 끄트머리 오솔길에 서 있는 몇 그루 나무들만 바라보면서 나무들이 분명하게 보일 즈음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 보았다 처음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아름다운 들판이..

Sur l´eau 2012.06.19

쥐며느리

살짝 건드리면 공처럼 움츠러드는 별볼일 없는 녀석이었다. 조금 있다 보니, 용기를 내어 금새 기지개를 폈다. 건드릴 때마다 몇 번이고 똑같이 반복했다. 어디 한번 해볼테면 해보자? 요놈봐라! 아차! 소심한 듯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용기있는 몸부림으로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을 묵묵히 걸어 가고 있었다. 그 녀석은 죽더라도 금방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아니, 그것은 어떤 본능이지?? 우린 그런 본능마저 잃어 버린걸까??? 우린 그 녀석만도 못하다. 기껏해야 한 자리에서 움츠렀다 폈다만을 반복하며 살아도 죽은 듯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을 걸어 가고 있지 못하다면. 시기, 질투, 집착, 경계, 회피, 체념, 포기를 반복하며... 2005년 1월 어느 날 K.-S. Kim h..

Sur l´eau 2012.06.01

실패의 변증법

현실에서 전적인 성공과 전적인 실패란 없다. 성공에는 실패가 실패에는 성공이 언제나 잠재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공했을 때 실패를 잊지 않고, 실패했을 때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공밖에 없다. 실패는 단순히 실패였던 것이 아니라, 성공의 한 과정이자 보증이였던 것이다. 실패는 그렇게 도전한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K.-S. Kim http://www.youtube.com/watch?v=sB7VOILoFgA&feature=related

Sur l´eau 2012.05.27

nomophobia

현대기술은 일상의 풍경을 수시로 바꿔 놓는다. 그러한 풍경은 막상 새로운 듯 보이지만, 천천히 들여다 보면 전혀 새롭지 않다. 단지 이전보다 자신의 본색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한 대기업이 TV에서 한 상품을 광고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휴머니즘"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이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살아있는 경험을 상실한 인간의 비인간성이였다. 스마트한 현대인들은 문제시되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들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병들어 심각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 차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국가 차원에서 정치경제적인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 ..

Sur l´eau 2012.05.19

Hiatus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실천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실천의 출발이다. 생각한 것을 누군가에게 글로 쓴다는 것과 신중하게 말한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실천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천은 아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분리는, 서양에서 근대 계몽주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1997년 IMF 이후,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악마는 자신이 계획한 이러한 분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때 지난, 그리고 기형화된 지식들을 대량으로 살포하면서 말이다. 현대 개인들은 좋거나 옳은 것을 알고 있어도 행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기자신을 느낀다. 느낄 때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에, 남 탓만 할 뿐, 변명할 구실만 찾을 뿐, 무기력한 자기자신 바로 앞..

Sur l´eau 2012.05.18

분노의 절정에서 명상하자.

가수 강산에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의 목소리로 인해 속이 시원해짐을 느낀다. 어제 한 신문에서 그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 보니,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생각도 시원시원했다. 그 기사를 발췌해 여기에 옮겨 본다. // "나는 누구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고민과 혼란 속에서 어느 날 사막으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질문을 시작으로 '나는 어디서 왔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관해 끊임없이 물으며, 나를 누르고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공연이 우리 사회 분노를 증폭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Sur l´eau 2012.05.17

오래된 책들

오늘에서야 비로소 책들을 받았다. 석 달 남짓 항해 끝에 나에게 돌아 온 낡고 오래된 책들, 자슥들 수고 많았다! 나를 보면서 자기를 열어, 어서 빨리 읽어 달라고 아우성치는 듯 했다. 한때는 어지간히도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녀석들이었는데, 각고 끝에 겨우 열어 볼라치면, 그리도 엄히 나를 꾸짖던 녀석들이었다. 이젠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운다. 손때 묻은 책장을 넘기면서, 독일에서 보냈던 시간, 그 잊지 못할 추억의 파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비겟츠 친구들, 박사논문 지도교수와의 첫 만남, 첫번째 박사과정 콜로키움, Stipendium, 노교수들의 脈 강의들, UKM, 새벽에 신문사 아르바이트, 주말 건물 청소아르바이트, 저 녀석들과 씨름하며 밤을 지새웠던 숱한 날들, Brot,..

Sur l´eau 2012.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