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 l´eau

Hiatus

Sur l´eau 2012. 5. 18. 10:20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실천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실천의 출발이다. 생각한 것을 누군가에게 글로 쓴다는 것과 신중하게 말한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실천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천은 아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분리는, 서양에서 근대 계몽주의 이후, 한국사회에서 1997IMF 이후,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악마는 자신이 계획한 이러한 분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때 지난, 그리고 기형화된 지식들을 대량으로 살포하면서 말이다.

 

현대 개인들은 좋거나 옳은 것을 알고 있어도 행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기자신을 느낀다. 느낄 때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에, 남 탓만 할 뿐, 변명할 구실만 찾을 뿐, 무기력한 자기자신 바로 앞에서 눈 감아 버린다. 그들은 비굴한 자기자신을 바라볼 용기가 없다. 비굴하고 용기 없는 자들의 유치함과 뻔뻔함은 대재앙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닥치는대로 먹어 치우는 현대판 악마의 손아귀 안에서 모든 실천은 악마의 먹잇감이다.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시대의 산업화된 사회 속에서 개인의 자기반성 없는 실천에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악마를 비판하는 피끓는 실천마저 악마의 위대한 관용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현대 개인들은 몰라도 행하고 있는 낯선 자기자신을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그럴 능력도 힘도 없다. 그들은 파산선고되었고, 파산선고해 버렸다.

 

파산면책을 받기 위해서, 잘못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대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살아 있는 우리는 묻고 따져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각자 자기 이름을 묻고 따지는 것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내 이름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내 이름을 걸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묻고 따져야만 한다.

 

노예들은 주인이 별 뜻 없이 부르는 낯선 이름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 이름에 관해서 물어서도 따져서도 안 된다는 음흉한 비밀을 누가 명령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지키고 따른다. 온전한 이름 없는 그들의 삶은 자기없는, 주인만을 위한 실천일 뿐이다. 현대판 악마는 이런 실천을 먹고 산다는 사실을, 노예가 아닌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그리고 외쳐야만 한다. 내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고!

 

 

K.-S. Kim

http://www.youtube.com/watch?v=vgFox3XK3m4&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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