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W. Adorno

편집증 환자

Sur l´eau 2008. 5. 28. 19:02

# 글은 TH.W. 아도르노의 , <계몽의 변증법>, "반유대주의의 요소들"이라는 논문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편집증 환자는 자신의 눈 먼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 상응하는 만큼 외부세계를 지각함으로써, 추상적인 집착에 내맡겨진 자기 자신만을 항상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자신과 더불어 파멸해 가는 자기 고유한 자아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권력 자체가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일정한 틀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켜쥐고서, 그것들의 고유한 속성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화적인 그물망에 모두 집어 넣는다.

 

항상 동일한 것이 보여주는 폐쇄성은 전능한 힘의 대용물로 된다. 그것은 마치 뱀이 최초의 인간들에게 말했던 것, 너희는 신처럼 될 것이다라는 그의 약속이 실현된 것처럼 말이다. 편집증 환자는 자신의 형상에 따라 모든 인간을 창조한다. 그는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인간들은 자신에게 봉사해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그의 의지는 모든 것을 뚫고 들어가 관철시키면서, 모든 것은 자신과 관계해야만 한다. 그의 시스템은 빈틈이 없다.

 

그는 낯선 자아가 질병을 보이기 이전의 단계에서든, 자신의 자아가 치료받을 필요가 있는 단계에서든,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힘을 별들에게 부여하는 점성술사이다. 그는 세계사를 피할 수 없는 재앙과 몰락의 집행자로 삼는 철학자이다. 그는 개별적으로 테러하거나 혹은 신중한 박멸전략을 통해서 이미 낙인 찍어 놓은 사람을 말살하는 광기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이거나 혹은 이성적인 것을 절대시하는 자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목표를 달성한다.

 

여자들이 전혀 흔들림 없는 편집증세를 보이는 남자를 숭배하듯이, 민중들은 전체주의적인 파시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것은 파시즘을 신봉하는 민중들 자신 속에 있는 편집증적인 것이 전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편집증 환자에게 화답한 것이고, 그들 속에 있는 양심에 대한 두려움이 양심 없는 자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을 내맡기는 꼴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듯 쳐다보는 자, 다시 말해서 자신들을 주체들로 대접하지 않고, 수많은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 장치들과 설비들을 다루는 작업에 내맡기는 자를 추종한다. 여자들은 도처에서 크고 작은 권력을 지닌 지위들을 차지하는 것을 자신의 종교로 삼으면서, 사회가 그들에게 전수시킨 사악한 사물들로 자신들을 만들어 갔다.

 

너무나도 순진한 유혹자의 시선으로써, 그들에게 자유를 떠오르게 하는 시선은 그들과 그렇게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세계는 거꾸로 되어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신자들의 시선을 꺼리는 늙은 신들처럼 그들은 베일 뒤에 죽음이 정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편집증적이지 않은 시선, 친근한 시선 속에서 자신들 안에서는 이미 죽어버렸던 자유로운 정신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들은 그 시선 밖에서는 자기유지를 위한 차가운 수단들만을 만나기 때문이다. 편집증적이지 않고 친근하게 마주치는 시선은 그들 속에서 부끄러움과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파시즘의 지도자처럼 미치광이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 때 조차도 그러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미치광이는 마주치는 시선을 그저 열광시킬 뿐이다. 자유로운 시선이 개성을 지닌 것처럼, 속담에서 말하 듯 눈을 꿰뚫어 보는 시선과 같은 것은 개성을 보존하지 못한다. 시선이 고정된 채 굳어진다. 고정된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유한 인격이 창 없는 단자의 장벽들 안에 머물라고 지시하면서, 그들에게 일방적인 충성을 강제한다. 그러한 시선은 양심을 일깨우기 보다는 그에 앞서 책임을 추궁한다. 사로잡을 듯 꿰뚫는 시선과 지나치듯 쳐다보는 시선, 최면을 거는 시선과 존중하지 않는 시선은 똑같은 속성을 지닌다. 말하자면 두 가지 시선 속에는 주체가 소멸된다. 그러한 시선들에는 반성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에,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러한 시선에 매료된다.

 

매료된 그들은 배반당한다. 편집증 환자를 숭배하던 여자들은 버림받고, 국민은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다. 편집증적으로 꽉 막힌 자는 신적인 권능을 희화화한다. 그는 절대군주와 같은 거만한 제스처를 취하지만, 그의 창조적인 능력은 전혀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가 찬탈한 원리, 즉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사랑 그리고 자신 속에 고요한 자유와 같은 속성들은 악마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결여되어 있다. 그는 강제적으로 내몰린 악인이지만, 자신의 강함만큼이나 그렇게 약한 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피조물을 자신에게 이끄는 것이 신적인 전능함이라고 말한다면, 사탄적이고 공상적인 전능함은 모든 것을 자신의 무력함 안으로 끌어 들인다. 그것이 그러한 전능함이 행사하는 지배의 비밀이다. 이성이나 의지로는 통제불가능한 상태에서 투사하는 자기는 자신의 불행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투사할 수 없다. 그는 반성하지 않는 까닭에 자기 자신 안에 정주하고 있는 불행의 근거를 따져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잘못된 투사의 산물들, 즉 천편일률적으로 틀에 박힌 사유의 과정과 실재성은 치유할 수 없는 산물이다. 자기 자신의 공허한 심연 속으로 침몰하는 자아에게 대상들은 몰락의 알레고리, 즉 자기 고유한 자아의 추락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알레고리가 된다.



번역: zwischen


Der Paranoiker

 

 

Indem der Paranoiker die Außenwelt nur perzipiert, wie es seinen blinden Zwecken entspricht, vermag er immer nur sein zur abstrakten Sucht entäußertes Selbst zu wiederholen. Das nackte Schema der Macht als solcher, gleich überwältigend gegen andere wie gegen das eigene mit sich zerfallene Ich, ergreift, was sich ihm bietet, und fügt es, ganz gleichgültig gegen seine Eigenart, in sein mythisches Gewebe ein. Die Geschlossenheit des Immergleichen wird zum Surrogat von Allmacht. Es ist, als hätte die Schlange, die den ersten Menschen sagte: ihr werdet sein wie Gott, im Paranoiker ihr Versprechen eingelöst. Er schafft alle nach seinem Bilde. Keines Lebendigen scheint er zu bedürfen und fordert doch, daß alle ihm dienen sollen. Sein Wille durchdringt das All, nichts darf der Beziehung zu ihm entbehren. Seine Systeme sind lückenlos. Als Astrologe stattet er die Sterne mit Kräften aus, die das Verderben des Sorglosen herbeiführen, sei es im vorklinischen Stadium des fremden, sei es im klinischen des eigenen Ichs. Als Philosoph macht er die Weltgeschichte zur Vollstreckerin unausweichlicher Katastrophen und Untergänge. Als vollendet Wahnsinniger oder absolut Rationaler vernichtet er den Gezeichneten durch individuellen Terrorakt oder durch die wohlüberlegte Strategie der Ausrottung. So hat er Erfolg. Wie Frauen den ungerührten paranoiden Mann anbeten, sinken die Völker vor dem totalitären Faschismus in die Knie. In den Hingegebenen selber spricht das Paranoische auf den Paranoiker als den Unhold an, die Angst vor dem Gewissen aufs Gewissenlose, dem sie dankbar sind. Sie folgen dem, der an ihnen vorbeisieht, der sie nicht als Subjekte nimmt, sondern dem Betrieb der vielen Zwecke überläßt. Mit aller Welt haben jene Frauen die Besetzung großer und kleiner Machtpositionen zu ihrer Religion gemacht und sich selbst zu den bösen Dingen, zu denen die Gesellschaft sie stempelt. So muß der Blick, der sie an Freiheit mahnt, sie als der des allzu naiven Verführers treffen. Ihre Welt ist verkehrt. Zugleich aber wissen sie wie die alten Götter, die den Blick ihrer Gläubigen scheuten, daß hinter dem Schleier Totes wohnt. Im nicht paranoischen, im vertrauenden Blick werden sie jenes Geistes eingedenk, der in ihnen erstorben ist, weil sie draußen bloß die kalten Mittel ihrer Selbsterhaltung sehen. Solche Berührung weckt in ihnen Scham und Wut. Der Irre jedoch erreicht sie nicht, selbst wenn er wie der Führer ihnen ins Antlitz blickt. Er entflammt sie bloß. Der sprichwörtliche Blick ins Auge bewahrt nicht wie der freie die Individualität. Er fixiert. Er verhält die anderen zur einseitigen Treue, indem er sie in die fensterlosen Monadenwälle ihrer eigenen Person weist. Er weckt nicht das Gewissen, sondern zieht vorweg zur Verantwortung. Der durchdringende und der vorbeisehende Blick, der hypnotische und der nichtachtende, sind vom gleichen Schlage, in beiden wird das Subjekt ausgelöscht. Weil solchen Blicken die Reflexion fehlt, werden die Reflexionslosen davon elektrisiert. Sie werden verraten: die Frauen weggeworfen, die Nation ausgebrannt. So bleibt der Verschlossene das Spottbild der göttlichen Gewalt. Wie ihm in seiner souveränen Gebärde das schaffende Vermögen in der Realität ganz abgeht, so fehlen ihm gleich dem Teufel die Attribute des Prinzips, das er usurpiert: eingedenkende Liebe und in sich ruhende Freiheit. Er ist böse, von Zwang getrieben und so schwach wie seine Stärke. Wenn es von der göttlichen Allmacht heißt, sie ziehe das Geschöpf zu sich, so zieht die satanische, eingebildete alles in ihre Ohnmacht hinein. Das ist das Geheimnis ihrer Herrschaft. Das zwangshaft projizierende Selbst kann nichts projizieren als das eigene Unglück, von dessen ihm selbst einwohnendem Grund es doch in seiner Reflexionslosigkeit abgeschnitten ist. Daher sind die Produkte der falschen Projektion, die stereotypen Schemata des Gedankens und der Realität, solche des Unheils. Dem Ich, das im sinnleeren Abgrund seiner selbst versinkt, werden die Gegenstände zu Allegorien des Verderbens, in denen der Sinn seines eigenen Sturzes beschlossen liegt.

 

Theoder W. Adorno, „Elemente des Antisemitismus“, in: ders., Dialektik der Aufklärung, Gesammelte Schriften 3, Hrsg. von Rolf Tiedemann, Frankfurt am Main 1984, S. 215ff.

'Th.W. Adorn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체와 객체에 대하여 (5)  (0) 2008.06.01
주체와 객체에 대하여 (4)  (0) 2008.06.01
주체와 객체에 대하여 (3)  (0) 2008.06.01
주체와 객체에 대하여 (2)  (0) 2008.06.01
주체와 객체에 대하여 (1)  (0) 2008.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