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Horkheimer

다수결 원칙

Sur l´eau 2008. 6. 7. 05:48

합리적 토대를 상실한 민주주의 원칙은 소위 국민의 이익 관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 국민의 관심은 맹목적이거나 지나치게 의식된 경제적 위력이 작용한 것이다. 국민의 관심은 결코 전제 정치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보장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유 시장 경제 체제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인권의 이념에 기초를 둔 제도들을 정부를 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에 좋은 장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 막강한 힘을 가진 경제 단체들이 독재를 세우거나 다수의 지배를 폐지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행위에 맞서[1]이성으로 정당화된 그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실제적 기회를 갖게 될 때,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을 막기 위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들 각자의 이익 관심이 위협받는 경우일 뿐, 진리나 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염려에 의해서가 아니다. 일단 민주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무너지게 되면, 독재가 나쁜 것이라는 확신은 단지 독재의 수익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만 합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이 확신이 그것의 반대로 전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이론도 없다.

미합중국의 헌법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모든 사회의 기본법을 위한 다수결 원칙 (lex maioris partis)[2]을 인정했지만, 결코 이성의 결정을 다수결로 대체하지 않았다. 그들이 통제와 상호간 힘의 균형을 위해 능숙하게 구상된 체계를 정부의 조직 구조 안에 도입했을 때, 웹스터(Noah Webster)의 말처럼 그들은 „의회에 주어진 권력이 광범위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권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3]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웹스터는 다수결 원칙을 „모든 직관적 진리가 그렇듯 보편적으로 승인된 이론“[4]이라고 불렀으며, 그 안에서 유사한 가치를 지닌 여러 자연적 이념들 중의 하나를 보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의 권위를 형이상학적이거나 또는 종교적 원천에 의탁하지 않는 원리 원칙이란 없다. 디킨슨은 정부와 정부의 임무가 „인간의 본성에 의해, 다시 말해 창조자의 의지에 의해 정당화되고 … 그리고 그 때문에 신성한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임무를 훼손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5]

물론 다수결 원칙 자체가 정의를 보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존 애덤스에 따르면 „다수는 영원히 그리고 예외없이 소수의 권리에 우선한다.[6] 이러한 권리들 그리고 모든 다른 근본 원칙들은 직관적 진리임에 틀림없었다. 그것들은 직 간접적으로 당시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전통으로부터 계승된 것이었다. 그것들은 서양 사유의 역사를 관통해서 그것들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뿌리까지 거슬러 추적될 수 있으며, 이러한 원천으로부터 디킨슨이 언급하는 ‚신성함‘을 보유하게 된다.

주관적 이성은 그러한 유산을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주관적 이성은 진리를 습관으로 치부하고, 이를 통해 진리에서 그것의 정신적 권위를 벗겨낸다. 오늘날 다수의 이념은 합리적 토대를 상실했으며, 완전히 비합리적인 관점을 받아들였다. 모든 철학적, 윤리적 그리고 정치적 이념- 그것의 역사적 뿌리와 연결된 끈이 절단되었으며-은 새로운 신화의 싹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특정한 단계에서 계몽의 진전이 미신과 광기로 퇴보하는 경향을 갖는 이유들 중의 하나다. 다수결 원칙은 각각의 모든 것들에 대한 보편적 판단의 형식 속에서, 그 판단이 모든 종류의 표결과 의사소통의 현대적 기술을 통해 효력을 갖듯이, 사유가 굴복해야 하는 자립적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다수결 원칙은 새로운 신(Gott)이다. 이것은 위대한 혁명의 선구자가 그것을 감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즉 현재하는 불의에 맞서는 저항력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길을 가지 않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힘으로서의 새로운 신이다. 사람들의 판단이 이런저런 관심에 의해 조작되면 될수록, 다수는 문명 생활 안에서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더 자주 갖는다. 다수는 대중을 속이는 저 밑바닥의 통속 예술과 통속 문학의 작품들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문화의 대용물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학문적 선전이 공적 여론에서 어두운 권력의 단순한 도구를 만드는 범위가 커질수록, 여론은 점점 더 이성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민주주의적 진보의 이러한 가상적 승리는 민주주의의 생명선인 정신적 실체를 소진시킨다.

 


[1]다수결 원칙의 부정적 측면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토크빌(Tocqueville) 전집의 편집자가 가졌던 두려움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Democracy in America, New York, 1898, Bd. I, 334 이하 각주 참조, 이 책의 번역서로는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1, 2 (한길사, 1997) 가 있다.〕 편집자는 „국민의 다수가 법을 제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멋진 표현일 뿐이다“라고 설명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법 제정이 실제로는 국민의 대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여기서 편집자는 아마도 토크빌이 다수의 전제정치에 관해 말한 부분을 인용한 편지에서 제퍼슨은 „제헌의회의 전제정치“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The Writings of Thomas Jefferson, 결정판, Washington, D.C., 1905, Bd. VII, 312 참조. 제퍼슨은 민주주의 안에서 „그것이 입법권이든 행정권이든 관계없이“ 모든 통치 권력에 대해 불신했으며, 그 때문에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같은 책, 323 , 참조.

[2]같은 책, 324 .

[3] „An Examination into the Leading Principles of the Federal Constitution …….“, in Pamphlets on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Paul L, Ford, ed. Brooklyn, N. Y., 1888, 45 .

[4]같은 책, 30 .

[5] „Letters of Fabius“, 같은 책, 181 .

[6] Charles Beard, Economic Origins of Jeffersonian Democracy, New York, 1915, 305 .


박구용 옮김, 『도구적 이성 비판』, 문예출판사2006, 50-53 : Max Horkheimer,  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 Aus den Vorträgen und Aufzeichnungen seit Kriegsende, Hrsg. von Alfred Schmidt, Fischer Taschenbuch Verlag 1997, S. 3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