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W. Adorno/Kommentar

반유대주의와 계몽의 원리 (1)

Sur l´eau 2008. 5. 29. 21:34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개념은 1879년 빌헬름 마르(Wilhelm Marr)가 『독일주의에 대한 유대교의 승리 Der Sieg des Jedentums über das Gemanenthum에서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증오를 기술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안된 이후 학술적 용어이자 저널리즘 용어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단어 그 자체로 반유대주의는 반셈족(Semites)이라는 뜻이지만, 이 개념은 반셈족주의보다 반유대주의가 정확한 번역어이다. 왜냐하면 반셈족주의의 대상은 셈족 전체가 아니라 전체 셈족 중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셈족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셈족은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셈의 후예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동일한 종족이라는 뜻보다는 같은 어원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반유대주의는 특정 종족(ethnic group)에 대한 혐오감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나치에 의한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거치면서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폭력적 지배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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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투사를 구사하는 병든 주체는 '편집증 (Paranoitiker)' 환자이다. 반유대주의는 계몽의 편집증적 징후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흥미롭게도 편집증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분석은 심리학적 분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잘못된 투사에 포획되어 있는 계몽적 주체의 '편집증'은 저자들에 의하면 계몽된 사회가 보여 주고 있는 집단 편집증의 모나드이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라는 개인의 편집증적 이상 징후의 산물이 아니라 계몽화된 사회가 보여 주는 집단 편집증의 사례인 것이다. 편집증 환자는 외부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지각한다. 편집증 환자는 대상의 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수다를 떨지만, 그들이 지적하는 대상의 속성은 실제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편집증 환자가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편집증 환자는 모든 것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든다." 편집증 환자는 유아적이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어떤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반유대주의의 잘못된 투사는 정신분석학이 지적한 '병적인 투사'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병적인 투사를 수행하는 편집증 환자는 "사회적으로 터부시된 충동들을 주체로부터 객체로 전이"시킨다. '병적인 투사'를 행하는 편집증 환자가 이디오진크라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비난하는 특정 대상의 속성은 바로 자신의 속성이다. 편집증 환자는 광적으로 보이지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에 편집증을 앓는다. 편집증 환자는 이디오진크라지적 반응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평가를 절대 바꾸지 않는다. 편집증 환자가 대상에 대해 갖고 있는 표상은 체계화된다. 그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위험한 '타자'일 뿐이다. 편집증 환자에게는 "초일관성"이 중요하다. 초일관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평가는 개입될 수 없다. 그래서 편집증에 빠진 사람은 논리와 체계의 악무한(schlechte Unendlichkeit)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논리와 체계 구축을 목표로 삼는 편집증은 계몽의 또 다른 측면이다.


계몽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은폐하려 한다. 대상 은폐는 계몽에게 사활적이다.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대상의 돌출은 자신의 정당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적 합리성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타자화한다. 타자화되지 않고 '거기'에 있는, 계몽적 합리성이 설명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계몽은 가장 비합리적 반응을 보인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반유대주의의 비합리성은 합리성으로부터의 이탈로 인해 생겨난 특이 현상이 아니다. 계몽의 합리성은 언제든지 반유대주의와 같은 비합리성을 배출할 수 있는 논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반계몽적인 광기의 물결처럼 보이는 홀로코스트의 씨앗은 계몽의 합리성에 있다. 반유대주의는 계몽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계몽의 또 다른 결과로 나타난 현대의 야만일 뿐이다.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야만으로 후퇴하는 현대』, 살림 2005, 244, 266-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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